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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조선을 만나다(1부)-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상세정보
상세정보 - 시대, 생산일, 소장처, 생산자명, 저작권자, 참고정보원, 관리번호, 관련자료 링크로 구성된 표
시대 2000년대~2020년대 생산일 2021-07-12
소장처 생산자명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 참고정보원
관리번호 VD_VO_00000007 관련자료링크
자료설명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공사 중 발견된 매장문화재에 대한 다큐영상 1편입니다.
영상 자막정보
[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로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에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리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음악]
<성우>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
국가 중추시설이 모여있고, 국가 경영 천년 철학이 담긴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 이곳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자막>
광화문광장 육백년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성우>
600년 고도 서울에 역사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인 광화문광장이 지금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산 사진, 세종대왕 동상 사진]

<MC 최태성>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장 축,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인데요 이렇게 무심코 오고가는 이 길 안에도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성우>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 도시 구획은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자 마자 천도를 실행하고, 정도전 등의 신하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 관부, 시가도로 공역을 명하였다.
그렇게 1394년에 궁궐 공역이 시작됐고, 1395년 마침내 경복궁과 관아, 육조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조거리 및 그 주변을 계획한 이들은 정도전을 비롯한 권중화, 심덕부 등의 유학자로 육조거리 계획시 정도전은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공식을 따랐다
좌묘우사는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배치, 오른쪽에 사직을 조성하는 원칙이고, 전조후시는 궁궐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뒤에 시장을 조성하는 원칙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라고 하는 관청들이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육조거리 또는 광화문 앞길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는데
경복궁이 조선시대 정궁이었고 그 앞쪽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역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상징거리 같은 곳이 되어있다.
<성우>
성우 : 조선 건국당시의 육조대로는 광화문앞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로 대궐로 통하는 길, 즉 어가였다.


<신희권 서???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경복궁과 광화문 그앞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관청이 있고 광화문광장이 그 앞의 마당이면서
그곳에 육조관청을 찾는 민원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한양의 도성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우>
육조거리의 관아는 시대에 따라 배치가 달라졌다.
조선후기 육조거리의 관아의 형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삼군부(현재 정부중앙청사 앞), 중추부, 사헌부(현재 : 세종로 공원), 의정부현재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한성부가 자리해 있고
육조인 병조, 형조(현재 세종문화회관), 공조(현재 현대해상 화재 옆), 이조, 예조, 호조(현재 광화문 전화국 KR앞)가 자리했다.
조선 후기의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관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 주변의 건물 지붕으로 육조건물 표시 - 왼쪽부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예조, 호조
<성우>
서구 열강이 들어오면서 육조거리의 공간변화는 더 가속화 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중추적 중앙관사가 이따라 폐지되었고 사실상 육조거리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육조거리를 없애고 도로를 확장해 조선시대 주요 권력기관의 위상과 상징성을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MC 최태성>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재배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악산 축이 동쪽 남산 방향으로 5~6도 틀어지게 됩니다.
2009년 광화문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의 방향으로 축을 바로 잡았고요, 그 축 선상에 있는 거리가 바로 육조입니다.

<성우>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공간인 광화문영역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광화문광장 문화재 정밀발굴조사가 시행됐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11월 까지 약 8개월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2년 10월~2021년 6월 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조사면적은 약 14600㎡ 내외이며, 정밀발굴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건물지 영역(육조의 남측영역) 등이다.

<정상택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장>
문화재 발굴을 하기 위해서 우선 시험발굴을 2019년 3월부터 8개월 정??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년도 10월 부터 정밀발굴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이라는것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부분을 충실히 잘 지켜내려고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 시민보행??? 불편함을 최소하하려 노력
발굴기간을 9단계로 나눠 보행통로를 확보하며 진행
<현장소리>현장감독 : 사진에서 보면 살짝 이렇게 해서 요쯤으로 해서 벽체를 세우는
여성분 : 그럼원래 계획대로 해도 되죠?

<성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발굴 변경허가를 받은 후 문화재 전문위원, 교수등으로 구성된 학술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으며
면밀히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안창모 경기대???교 건축학과 교수, 자문위원단>
육조대로라는 것은 조선의 역사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공간인데그동안 이 부분을 우리가 굉장히 현대화된 모습속에서 경복궁을 통해서만 상상해왔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발굴현장은 역사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굉장이 중요한 유적이죠
조선의 건국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현대 도시에서 상상하기는 어렸웠거든요
그런데 바로 지금 이 발굴현장은 그대로 역사적 현장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우>
조사결과 의미있는 유구가 발견됐는데 삼군부, 예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된 전신주 일부가 확인, 해치상의 원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삼군부의 외부 행랑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자막>
1869년 고종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
행랑 : 대문 양쪽 도는 문간 옆에 있는 방.

<성우>
배수로 경계석 일부에서는 견치선이 발견되어
<자막>
배수로 규모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 확인
기단석 : 건축물의 기초로 쌓는 돌
<성우>
일제강점기에 배수로 정비를 일부 진행한것으로 추정된다.


(4지점)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물을 집 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헌부터에서 발견된 우물은 문지 추정지역 남측에서 확인됐다는 특이점이 발견됐다.

(5지점)형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기단 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인되었다.
(7지점)육조의 남측영역에서는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눈으로 보고 직접 발로 다녀본 시민들의 소감은 어떨까?
<윤성희>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책속의 사진 하나가지고 배우지만, 실제로 와보면 우물이 어떤 형으로 되어있고 배수로는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를 보게 되어 선조들이 참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깨닳음
<김혜미>
그 시대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른것 같고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김민후>
옛 선조들이 잘 지키고 보존했던것을 지금 시대에서도 어떻게(보존할지를 )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우>
앞으로 광화문 광장과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대궐?? 통하는 길이던 어가, 백성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던 공간의 뜻을 담아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리로 거듭날 것이다.

<MC최태성>
우??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길 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재가 살아숩쉬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고 하죠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서 나온 문화재는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그리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하고 보존해서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
600년 전 조선을 만나다-광화문광장의 역사와 매장문화재.mp4 [ 812.8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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