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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조선을 만나다(2부)-발굴된매장문화재
상세정보
상세정보 - 시대, 생산일, 소장처, 생산자명, 저작권자, 참고정보원, 관리번호, 관련자료 링크로 구성된 표
시대 2000년대~2020년대 생산일 2021-07-12
소장처 생산자명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실 광화문광장추진단 참고정보원
관리번호 VD_VO_00000006 관련자료링크
자료설명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공사 중 발견된 매장문화재에 대한 다큐영상 2편입니다.
영상 자막정보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발굴된 매장문화재

<성우>
육백년전 조선의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이곳 광화문광장이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 관아등이 육조거리와 함께 완성되었고 그동안 도로 밑에 매장되었던 육조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약 8개월간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발굴된 육조는 조선 후기 고종 시기의 모습과 조선 전기의 모습이 남아 있다.
<자막>
광화문 서측 건물영역 표시. 순서대로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육조의 남측 영역
<성우>
정밀발굴 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 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2지점), 사헌부(4지점), 형조(5지점), 공조(6지점), 육조의 남측 영역(7지점)이다.

본격적인 발굴 장소인 이곳은 2지점이다.
2지점은 예조터이자 고종때 삼군부의 역할을 했던 터이다
고종연간 1869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되는 삼군부의 외부 행랑이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조사된 삼군부 외부 행랑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에서 확인된 행랑의 위치와 형태가 거의 동일했다.
1950년대까지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지만 철거된 후 도로가 개설되었다.
확인된 행랑의 규모는 8칸, 측면 1.5칸이며 조사 경계 외부로 계속 이어지는 양상이다.
주칸 거리는 정면이 약 278~ 286cm, 측면 2810cm, 퇴는 176cm 내외이다.
<자막>
주칸 : 기둥의 간격과 배치 등의 거리
퇴 : 본채와 앞뒤나 좌우에 딸린 빈 칸 너비의 칸살
<성우>
행랑의 기단석을 따라가면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석재를 보면 시대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군부 배수로의 경계석 일부에서 견치석으로 설치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자막>
견치석[犬齒石] ① 모양이 송곳니를 닮아 이름이 붙음 ② 면 크기 30~45cm각, 뒤굄길이가 35~60cm 정도
<성우>
견치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주로 사용하던 석재로 일제강점기 삼군부 배수로를 일부 정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 기운을 막고 궁궐을 지키라는 뜻을 담은 해치상.
광화문 앞 옛 사진을 보면 해치상 위치가 지금과 다름을 알 수 있다.
해치상이 삼군부 앞에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번에 발굴된 삼군부 터에서 전신주의 밑둥을 찾았고 전신주 앞에 해치상 있었음을을 추정할 수 있다.

?군부터에선 건물을 바라보는 시대별 눈높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일 높은 곳은 고종시기 그리고 낮은 곳은 태조와 세종시기로 추정되는 지반을 확인할 수 있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광화문에 위엄이 달라보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시대에 따라 광화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이유는 뭘까?
옛 한양도성은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되 살았다.
화재나 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으면 피해를 입은 건물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재해로 인해 이미 주변에 지대가 높아지면 예전에는 지반 높이까지 낮출 수 있는 토목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피해를 입은 건물 기초 위에 흙을 덮고 기초를 새로 다져 구조물을 세우는 손쉬운 방법을 취했다. 그로인해 시대별 지반의 높이가 다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4지점은 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이번 조사 결과 사헌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됐다.
문지 규모는 전면 1칸(주칸 512cm), 측면 3칸(주칸 238cm 내외)이다.

담장은 육조를 따라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자막>
잡석렬과 담장석 일부 존재. 잡석렬 : 성벽이나 담장을 쌓는 돌의 일부
<성우>
행랑 유구는 담장 내측으로 확인되었다, 전반적인 잔존 상태는 좋지 않아 적심석 일부 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막>
석심석 :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성우>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우물이 발견됐다. 우물은 집밖에 아닌 집안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조사에서 뜻밖의 장소에서 우물를 발견했는데 사헌부로 들어가는 입구 그러니까 건물 외부에서 우물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은 왜 사헌부 입구에 있었던 것일까? 비밀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배수로는 조사 지역 남측에서 북동측으로 꺽어진 형태로 확인되었으며 여러번의 중복도 확인되었다.
배수로의 폭은 약 120~140 cm 내외로 장대석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배수로에 사용된 석재는 주로 장대석을 사용하셨는데 석재의 다듬기나 규모로 판단할 때 상당한 정성을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시대를 가늠할 수 있다.

5지점은 형조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형조터에 조사 유구는 조사 지역의 남서측과 남동측 일부에서만 확인되었다.
형조터의 중앙은 건물의 시설과 관련한 지하 구조물로 인하여 대부분의 영역이 교란된 상태였다.
형조터에서 추정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는데 남서측의 배수로는 대부분 훼손된 것과 달리 남동측 배수로는 그나마 어느 정도 모양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은 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조사유구는 조사지역의 동측에서만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기단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기단은 건축물에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이며, 석렬은 기단을 둘러싼 띠처럼 이루어 진 것을 말하는데 그 일부가 발견된 것이다.
공조터는 지하 구조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어 정확한 형태와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지반의 높낮이가 다름을 포착, 두 시대가 있음을 추정한다.

7지점은 육조의 남측 영역이다.
7지점의 북서측 일부를 제외하고 조사 지역 전반에서 유구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유구는 건물지, 근대시기로 추정되는 동서방향의 배수로 1기 그리고 17~18세기 조선 시대로 추정되는 남북 방향의 배수로 1기와 우물이 확인되었다.
건물지인 만큼 함께 출토된 유물도 존재했다.
출토 유물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해당하는 자기편과 기와편이 함께 출토되어 시기적으로 중복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조사 구간 내에서 여러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조선 1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분청자접시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선 1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백자화형잔편을 볼 수 있었다.

현재와 과거에 끊임없는 대화 역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연결선이다.
육백 년전 조사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발굴된 매장문화재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발굴된 매장문화재

<성우>
육백년전 조선의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이곳 광화문광장이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 관아등이 육조거리와 함께 완성되었고 그동안 도로 밑에 매장되었던 육조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20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약 8개월간 시행하였고 정밀발굴조사는 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시행했다.
발굴된 육조는 조선 후기 고종 시기의 모습과 조선 전기의 모습?? 남아 있다.
<자막>
광화문 서측 건물영역 표시. 순서대로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육조의 남측 영역
<성우>
정밀발굴 조사 대상은 주로 광화문 육조 거리의 서편지역인 삼군부(2지점), 사헌부(4지점), 형조(5지점), 공조(6지점), 육조의 남측 영역(7지점)이다.

본격적인 발굴 장소인 이곳은 2지점이다.
2지점은 예조터이자 고종때 삼군부의 역할을 했던 터이다
고종연간 1869년에 중건된 것으로 판단되는 삼군부의 외부 행랑이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조사된 삼군부 외부 행랑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에서 확인된 행랑의 위치와 형태가 거의 동일했다.
1950년대까지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지만 철거된 후 도로가 개설되었다.
확인된 행랑의 규모는 8칸, 측면 1.5칸이며 조사 경계 외부로 계속 이어지는 양상이다.
주칸 거리는 정면이 약 278~ 286cm, 측면 2810cm, 퇴는 176cm 내외이다.
<자막>
주칸 : 기둥의 간격과 배치 등의 거리
퇴 : 본채와 앞뒤나 좌우에 딸린 빈 칸 너비의 칸살
<성우>
행랑의 기단석을 따라가면 폭 80cm, 깊이 40cm 내외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석재를 보면 시대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군부 배수로의 경계석 일부에서 견치석으로 설치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자막>
견치석[犬齒石] ① 모양이 송곳니를 닮아 이름이 붙음 ② 면 크기 30~45cm각, 뒤굄길이가 35~60cm 정도
<성우>
견치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주로 사용하던 석재로 일제강점기 삼군부 배수로를 일부 정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 기운을 막고 궁궐을 지키라는 뜻을 담은 해치상.
광화문 앞 옛 사진을 보면 해치상 위치가 지금과 다름을 알 수 있다.
해치상이 삼군부 앞에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번에 발굴된 삼군부 터에서 전신주의 밑둥을 찾았고 전신주 앞에 해치상 있었음을을 추정할 수 있다.

?군부터에선 건물을 바라보는 시대별 눈높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일 높은 곳은 고종시기 그리고 낮은 곳은 태조와 세종시기로 추정되는 지반을 확인할 수 있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광화문에 위엄이 달라보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시대에 따라 광화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이유는 뭘까?
옛 한양도성은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되 살았다.
화재나 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으면 피해를 입은 건물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재해로 인해 이미 주변에 지대가 높아지면 예전에는 지반 높이까지 낮출 수 있는 토목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피해를 입은 건물 기초 위에 흙을 덮고 기초를 새로 다져 구조물을 세우는 손쉬운 방법을 취했다. 그로인해 시대별 지반의 높이가 다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4지점은 사헌부 병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이번 조사 결과 사헌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문지, 담장 그리고 배수로와 행랑이 확인됐다.
문지 규모는 전면 1칸(주칸 512cm), 측면 3칸(주칸 238cm 내외)이다.

담장은 육조를 따라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자막>
잡석렬과 담장석 일부 존재. 잡석렬 : 성벽이나 담장을 쌓는 돌의 일부
<성우>
행랑 유구는 담장 내측으로 확인되었다, 전반적인 잔존 상태는 좋지 않아 적심석 일부 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막>
석심석 :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성우>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우물이 발견됐다. 우물은 집밖에 아닌 집안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조사에서 뜻밖의 장소에서 우물를 발견했는데 사헌부로 들어가는 입구 그러니까 건물 외부에서 우물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은 왜 사헌부 입구에 있었던 것일까? 비밀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배수로는 조사 지역 남측에서 북동측으로 꺽어진 형태로 확인되었으며 여러번의 중복도 확인되었다.
배수로의 폭은 약 120~140 cm 내외로 장대석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배수로에 사용된 석재는 주로 장대석을 사용하셨는데 석재의 다듬기나 규모로 판단할 때 상당한 정성을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시대를 가늠할 수 있다.

5지점은 형조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형조터에 조사 유구는 조사 지역의 남서측과 남동측 일부에서만 확인되었다.
형조터의 중앙은 건물의 시설과 관련한 지하 구조물로 인하여 대부분의 영역이 교란된 상태였다.
형조터에서 추정 배수로 3기가 확인되었는데 남서측의 배수로는 대부분 훼손된 것과 달리 남동측 배수로는 그나마 어느 정도 모양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시점은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조성된 배수로로 추정된다.

6지점은 공조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다
조사유구는 조사지역의 동측에서만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기단석렬 1기와 추정 배수로 1기가 확인되었다.
기단은 건축물에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이며, 석렬은 기단을 둘러싼 띠처럼 이루어 진 것을 말하는데 그 일부가 발견된 것이다.
공조터는 지하 구조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어 정확한 형태와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지반의 높낮이가 다름을 포착, 두 시대가 있음을 추정한다.

7지점은 육조의 남측 영역이다.
7지점의 북서측 일부를 제외하고 조사 지역 전반에서 유구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건물지 약 13동과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유구는 건물지, 근대시기로 추정되는 동서방향의 배수로 1기 그리고 17~18세기 조선 시대로 추정되는 남북 방향의 배수로 1기와 우물이 확인되었다.
건물지인 만큼 함께 출토된 유물도 존재했다.
출토 유물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해당하는 자기편과 기와편이 함께 출토되어 시기적으로 중복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조사 구간 내에서 여러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조선 1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분청자접시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선 1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백자화형잔편을 볼 수 있었다.

현재와 과거에 끊임없는 대화 역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연결선이다.
육백 년전 조사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

<음악, 자막>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국가 중추시설이 밀집도어있고 국가 경영 천년철학이 담긴 대한민구의 상징
광화문광장 육백년 전 조선을 만나다. 발굴된 매장문화재
600년 전 조선을 만나다(2부)_발굴된매장문화재.mp4 [ 731.1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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