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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의 상징
모두를 위한 광장의 시작
일상과 문화를 잇는 광장
숲과 그늘이 있는 공원같은 광장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물길
조선시대 육조의 흔적
위치 : 해치마당
운영시간 : 화~토 09시~18시
위치 : 해치마당
- 이용시간 : 05:00 ~ 익일 01:00
세종로공영주차장 화장실(B1)
- 세종로공원 내 주차장 지하1층, 상시개방
위치 : 해치마당
비품 : 쇼파, 세면대, 기저귀교환대
위치 : 해치마당
비품 : 쇼파, 테이블, 세면대
음료 자판기
- 세종로공원 주차장출입구 앞
- 한글분수 벤치 앞
- 해치마당 내
민족의 영웅으로서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승하하신 최초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의 동상. 높이 6.2m, 폭 4.3m 규모로 4.2m 기단(基壇)위에 좌상형태로 남쪽을 향해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왼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페이지는 용자례 - 훈민정음 글자의 사용 예를 정리한 것)을 , 오른손은 가볍게 들어 신하들에게 온 백성이 훈민정음을 널리 쓰도록 하라는 대왕의 정신을 표현하였습니다. 기단 바로 앞에는 훈민정음 원문과 해석문이, 동상 전면부에는 세종대왕의 주요 과학 발명품인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모형을, 후면부에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상징하는 기둥형태의 6개의 열주가 세워져 있습니다.
제막일 : 2009.10.9.
조선 중기 명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한산도, 명량 등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낸 이순신 장군의 동상
전체 높이 17m(동상 6.5m, 기단 10.5m)의 청동 입상 형태로, 기단에는 거북선 모형이, 기단앞에는 북 2개가 놓여있으며, 기단 옆에는 전진하는 군함의 모습이 양각되어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동상주변에는 명량분수와 함께 이순신장군 승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제막일 : 1968.4.27.
세종대왕 동상 기단 후면에는 세종이야기 전시관 입구가 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 옛 지하 보․차도 공간과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조성된 세종이야기․충무공이야기 전시관에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혼과 업적이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지하전시관으로 통하는 출입구에 설치된 큐브형태의 ‘미디어글라스’에서는 세종대왕과 충무공의 업적부터 한글 콘텐츠, 신진작가들의 창의적인 미디어아트 작품이 선보입니다.
관람료 | 무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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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 10:00~18:30 (입장마감 18:00)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단, 월요일이 법정공유일인 경우 정상개관 하고 공휴일 다음의 첫 번재 평일에 휴관) |
문의 및 안내 | 세종문화회관 02)399-1000 |
모두를 위한 광장의 시작. 해치마당입니다.
광화문역과 광화문광장을 연결하고, 휴식과 만남의 장소가 되는 곳입니다.
해치마당 내부와 광장을 연계하는 경사로에 조성된 계단형 쉼터입니다.
나무 그늘아래에서 휴식과 영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해치마당 경사로 벽면에서 다양한 영상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에서 비롯한 한글의 근본, 천지인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특히, 사람 인(人)을 주제로한 “광화 Aquarium”, “Poloraid” 작품은 현장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 월대와 이어지는 공간으로 조선시대 주요 관청들이 있던 육조거리를 상징합니다. 광화문의 아름다운 경관을 살리기 위해 넓은 잔디마당을 만들었습니다. 잔디주변으로는 전통적인 우물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가 돌포장 되어있습니다.1392년 조선건국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돌판에 기록한 역사물길이 이곳 육조마당에서 시작하며, 역사물길 옆에 설치된 ‘앉음 벽’에 앉아 역사의 흐름을 느끼며 바로 옆에 심은 소나무 숲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동상과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는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 집니다. 놀이마당 양측에서는 행사 관람과 휴식을 위한 앉음터와 넓은 의자가 있습니다.
잔디마당에 이어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은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 정원’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문화 속에서 문인들과 화가들에게 사랑받아온 소나무를 광장 초입에 배치하였습니다. 키 큰 소나무 장송 군락 사이로 광화문과 북악산의 경관을 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중에 드러난 지층과 사헌부터, 배수로, 우물 등은 서울의 오랜 역사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한국의 자생수종을 중심으로 한국의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고궁에서 사용되었던 화계(층계모양으로 단을 만들어 화초를 심음)에서 영감을 얻은 장대석 화단이 풍성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세종문화회관 앞, 공원의 일상을 담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북악산에서 경복궁과 광장으로 자연이 연결되는 공간을 담고자 보통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참나무 숲을 조성하였습니다. 문화쉼터 나무 아래에는 누구나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는 긴 테이블‘모두의 식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쉴 수 있도록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공간입니다. 바닥에는 전국에서 생산된 돌들을 조각보 문양으로 설치하였습니다.
복잡한 세종대로 사거리를 벗어나 숲과 같은 녹음이 풍부한 휴식공간입니다. 느티나무, 느릅나무, 팽나무 같은 키가 큰 나무를 비롯하여 산수국, 박태기나무, 병꽃나무 등 키 작은 나무와 초화류가 어우러져 숲과 같은 녹음이 풍성한 휴식공간을 선사합니다.
광화문광장에는 1392년 조선건국부터 630년 역사의 물길이 흐릅니다. 역사물길은 정부서울청사 앞 육조마당에서 시작하여 광화문광장 전체를 흘러 한글분수까지 이어집니다.
물길을 따라 돌판에 새겨진 우리나라 주요 역사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광장과 조선시대 유구의 단차(1.2m)를 이용, 벽면에서 물이 흐르게 하여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수경시설입니다.
사헌부 터 입구에서 발견된 우물을 모티브로 하여 오목하게 패인 물이 샘솟는 어린이 물놀이 공간입니다.
참나무 숲 그늘 아래, 물 표면에 비춰진 숲과 하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탁자형태의 예쁘고 작은 수조입니다.
광복 후부터 광장개장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을 상징하는 분수입니다. 터널분수 아래에 광복 후 77년의 역사물길이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음용금지
맨발 사용 금지(물놀이용 신발 착용)
구토·설사증상이 있거나, 전염병 피부병이 있을 경우 이용금지
물놀이용 기저귀 착용
대소변이나, 침뱉는 행위금지
음식물, 이물질(유리 등) 반입금지
애완동물 진입금지
뛰거나 과도한 장난 금지
한글창제 원리인 천, 지, 인을 모티브로 하여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형태를 연출한 놀이형 글자분수입니다. 분수에 표시되는 한글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음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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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설사증상이 있거나, 전염병 피부병이 있을 경우 이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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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 이물질(유리 등) 반입금지
애완동물 진입금지
뛰거나 과도한 장난 금지
충무공의 해전을 상징하는 바닥분수입니다.
동상 내측 분수의 133개 노즐은 명량해전 당시 133척의 왜선 격퇴를, 외측 분수는 한산도 대첩 당시 학익진(鶴翼陳,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진을 쳐 적을 측면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전술) 전법을 상징합니다.
또한 분수 앞 바닥 조명은 이순신장군 탄생년도 1545년을 모티브로 하여 길이를 15.45m로 만들었습니다.
음용금지
맨발 사용 금지(물놀이용 신발 착용)
구토·설사증상이 있거나, 전염병 피부병이 있을 경우 이용금지
물놀이용 기저귀 착용
대소변이나, 침뱉는 행위금지
음식물, 이물질(유리 등) 반입금지
애완동물 진입금지
뛰거나 과도한 장난 금지
사헌부 문 터 전시장은 이 일대의 발굴에서 나온 매장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공유하기 위해 조성하였습니다.
전시장이 조성된 장소는 사헌부가 있던 곳으로, 2020년 10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배수로와 우물, 사헌부 청사의 담장과 출입문 터, 행랑 유구(遺構)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전시장은 지상에서 대략 1.2m 아래 공간으로 지붕은 한국 전통 가옥의 처마 곡선을 살리고, 기둥은 인근 나무와 비슷한 두께와 높이로 만들어 기둥 사이 광화문의 풍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은 조선시대 관청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 중 사헌부 문터에서 발굴된 우물과 문지를 노출전시 하고, 그 외 현장은 복토 후 상부에 담장, 배수로 등을 재현하여 육조의 흔적을 담았습니다.
1지점 육조마당은 광화문, 북악산과 함께 좌측 소나무 숲과 광화문광장 포장 문양이 보이는 풍경
2지점 세종대왕 앞에서 좌측으로 세종대왕동상과 광화문 그리고 수목을 함께 보는 풍경
3지점 이순신장군 동상은 명량분수와 이순신장군동상 그리고 멀리 광화문까지 한눈에 담아낼 수 있는 풍경
혼천의 |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 구실을 한 기구인 혼천의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짐작되는데 기록상으로는 세종15년(1433년) 장영실과 이천 등이 왕명에 의해 제작한 것이 최초의 혼천의로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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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 세종 23년(1441년)에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강우량 측정기구이다. 원통형 모양으로 처음에는 깊이 약 41cm, 지름 약16cm 였지만 1442년 5월, 측우에 관한 제도 제정과 함께 깊이 약 31cm, 지름 약 14cm로 규격이 개량되어 조선말기까지 쓰였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해시계 (앙부일구) |
세종19년(1437년) 장영실이 처음 만든 해시계이며, 솥 모양을 닮아 앙부일구라고 하였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세종 때의 앙부일구는 일반서민이 보기 쉽도록 서울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세워 뒀던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
육진개척도 | 세종대왕은 김종서, 이징옥 장군 등을 현재의 함경도인 함길도로 보내어 여진족을 정벌하고 회유하는 한편, 남쪽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회령, 경원, 온성, 종성, 경흥, 부령의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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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도 | 서운관은 천문학을 주관하던 곳이었다. 천문과 기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세종대왕은 1433년 석축간의대를 준공하여 본격적인 천문연구를 시작하였다. ‘서운관도’는 세종대왕께서 세자를 데리고 경복궁 후원의 간의대에 직접 올라가 대간의를 이용하여 북극성을 관찰하는 모습이다. |
주자소도 | 주자소는 조선시대의 인쇄소이다. 세종은 1421년 주자소를 설치하여 주자와 조판법을 개량하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만들어 많은 서적을 출판하였다. 세종17년에는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주자소도는 책을 인쇄하고 있는 주자소의 광경을 그렸다. |
대마도정벌도 | 세종대왕은 세종 원년(1419년)에 이종무 장군 등 1만7천여 군사를 대마도에 보내어 섬을 정벌하였다. |
지음도 |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을 정리하고, 편경, 편종 등의 악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지음도’는 박연이 경기도 남양에서 처음 발견한 경돌로 만든 편경 12매를 세종 9년 편전에 음가를 시험할 때의 장면이다. |
집현전학사도 | 세종이 즉위하면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은 집현전은 당대 최고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집현전학사도’에는 집현전에서 서적의 편찬과 제도의 연구고증에 열중하고 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의 모습이 보인다. |
1592년 5월 7일(음력)에 이순신이 주도적으로 지휘한 조선 함대가 옥포(玉浦,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일본의 군선 26척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은 이 해전에서 최초로 일본에 승리하였다.
1592년 5월 29일~6월 1일(음력)에 이순신이 주도적으로 지휘한 조선 함대가 사천(泗川,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일본의 군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이 해전에서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1592년 6월 2일(음력)에 이순신이 주도적으로 지휘한 조선 함대가 당포(唐浦,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일본의 군선 21척을 격파하였다. 거북선을 이용한 전술로 일본의 대장선을 격파하였다.
1592년 6월 5일(음력)에 조선의 연합 함대가 당항포(唐項浦, 경상남도 고성시)에서 일본의 군선 28척을 격파하였다. 전라우수영의 수군이 이 해전에 참전함으로써 연합 함대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592년 7월 8일(음력)에 조선의 연합 함대가 한산도(閑山島,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유인 작전을 펼쳐 일본의 군선 59척을 격파하였다. 이 해전은 행주 대첩, 진주성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1592년 7월 10일(음력)에 조선의 연합 함대가 안골포(安骨浦,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일본의 대선 20여 척을 격파하였다. 포구가 좁은 안골포의 지형을 이용하여 판옥선들이 번갈아 가며 공격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9월 1일(음력)에 조선의 연합 함대가 부산포(釜山浦, 부산광역시)에서 일본의 군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본거지였던 부산포를 직접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해전이었다.
1593년 2월 10일~3월 6일(음력)에 조선의 연합 함대가 웅포(熊浦,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7차례 전투를 수행하였다. 일본 수군이 전투를 회피함에 따라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육군과 협공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1594년 3월 4~5일(음력)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연합 함대가 당항포(唐項浦, 경상남도 고성시)에서 31척의 일본 군선을 격파하였다. 이순신의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둔 해전이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1597년 9월 16일(음력)에 명량(鳴梁,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 사이의 해협)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군선 133척에 맞서서 31척을 격파하였다.
1598년 7월 19일(음력)에 이순신의 조선 함대가 절이도(折爾島, 전라남도 고흥군) 근처에서 일본의 군선 6척을 격파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이 재건에 성공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1598년 11월 19일(음력)에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의 연합 함대가 노량(露梁, 경상남도 하동군과 남해도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의 군선 200척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 첫 출전하는 군사들이 긴장을 풀고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도록 함.(임진장초)
1592년 임금의 피난 사실을 듣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함.(이충무공전서)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후 수군을 폐하라는 임금의 지시에 수군의 필요성을 호소함.(이충무공전서)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병법을 인용하여 장수들에게 필승을 강조함.(난중일기)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수들의 사기를 높임.(난중일기)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음을 앞두고 병사들의 사기를 염려함. (이충무공전서)
평소 장군의 마음가짐과 우국충정을 보여줌.(이충무공전서)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선유도사에게 왜적을 반드시 물리치겠다는 각오를 밝힘.(이충무공전서)
“뇌물을 바치고 죽음을 모면하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 그를 꾸짖음.(이충무공전서)
임금이 왜적의 침략으로 피난가는 위태로운 현실을 한탄함.(난중일기)
1593년 명나라와 일본의 회담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는 일본의 전술임을 알고 적을 공격할 기회라고 주장함.(난중일기)
적과의 전투에 임하는 기본자세를 보여줌.(난중일기)
1597년 1월 13일 백의종군할 때 어머님의 부고를 듣고 비통한 심경을 드러냄. (난중일기)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 출전하기 전 배에서 하늘에 기원을 올림.(이충무공전서)
1594년 2월 13일 적의 배가 소규모로 출현했다는 첩보를 듣고 명령함.(난중일기)
1592년 부산포해전에 임하는 전략을 논의함.(이충무공전서)
친척인 율곡 이이가 인사권자로 있을 때 그를 만나 보라는 말을 거부함.(이충무공전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신하로서의 마음 자세를 밝힘.(이충무공전서)
1595년 1월 1일 새해에 나라와 부모를 생각함.(난중일기)
1595년 7월 1일 홀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함.(난중일기)
1597년 명량해전에서 군사들을 독려함.(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검에 새겨진 문구임.(이충무공전서)
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장군이 아들의 부고를 들음.(난중일기)
삼군부 터 | 삼군부는 조선 초기에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일반 정무를 관장하는 의정부의 맞은편에 청사가 있어서 정부(政府)와 군부(軍府)의 분리를 상징하였다. 태종 때 병조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없어졌다가 1868년(고종 5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군비 강화에 큰 역할을 수행하다가 근대적인 군사 제도의 개편을 추진하던 1882년(고종 19년)에 다시 해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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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터 | 예조는 의례와 음악, 제사, 외교, 교육, 문과 시험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천문(天文)•시간과 관련한 업무도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육조에서 예조의 서열이 높아졌는데, 이것은 통치의 기반으로 학문과 예악(禮樂)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선 왕조의 문치주의(文治主義)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지금의 교육부•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
중주부터 | 중추부는 조선 시대에 군사 기밀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조선 초기에 관직 제도의 변화에 따라 권한과 역할이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다가 15세기 중반부터 군사적 기능이 없어지고 고위 관원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직에서 물러난 고위 관원이 국정에 참여하는 통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사헌부 터 | 사헌부는 나랏일에 대해 논쟁하고 비리 관원을 탄핵하는 관청이었다. 5품 이하 관원의 임명과 법률 제정에 대한 동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금령(禁令) 집행 등의 사법 기능을 담당하였다. 국가 기강과 관련한 큰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사헌부 관원의 기강은 매우 엄격하였다. 사간원•홍문관과 함께 언론을 담당하는 3대 관청이었다. 지금의 검찰이나 감사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
병조 터 | 병조는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무관의 선발, 군적(軍籍)과 병기의 관리, 군사 훈련, 왕의 호위, 궁궐과 도성 방위 등을 담당하였다. 군사 업무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다른 육조와 달리 당상관으로 참지(參知) 1인을 더 두었다. 조선 후기에 훈련도감을 비롯한 5개의 군영이 설립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국방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
형조 터 | 형조는 재판․형률 집행․노비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형률 조항에 대해 유권 해석을 내리고, 왕이 사형수의 죄를 심의할 때 실무를 담당하였다. 지방관이 판결한 송사를 수리하여 재판을 진행하는 등의 상급 법원의 역할, 죄수 관리와 처벌 등의 업무도 담당하였다. 노비 송사는 산하에 장례원(掌隷院)이라는 관청을 두어 맡게 하였다. 지금의 법무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
공조 터 | 공조는 토목․건축 공사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전국의 산림과 하천, 배와 수레, 기술자를 관리하고, 도량형을 배포하며, 각종 도구를 제작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소규모 공사는 공조 산하의 선공감(繕工監)이 수행하였으나, 도성 수축이나 왕릉 조성 등의 대규모 공사는 임시 관청인 도감(都監)을 두어 담당하게 하였다. 지금의 국토교통부․산업통상자원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
연도 | 왕력 | 주요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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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 (태조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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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 (태조 2년) | |
1394년 | (태조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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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 (태조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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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 | (태조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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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년 | (태조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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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 (태조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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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 | (정종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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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 (정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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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 (태종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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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 (태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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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년 | (태종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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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 (태종 4년) | |
1405년 | (태종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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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년 | (태종 6년) | |
1407년 | (태종 7년) | |
1408년 | (태종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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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년 | (태종 9년) | |
1410년 | (태종 10년) | |
1411년 | (태종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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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년 | (태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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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 | (태종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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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년 | (태종 14년) | |
1415년 | (태종 15년) | |
1416년 | (태종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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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 (태종 17년) | |
1418년 | (태종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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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 | (세종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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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 | (세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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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년 | (세종 3년) | |
1422년 | (세종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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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3년 | (세종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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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 | (세종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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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년 | (세종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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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 | (세종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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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년 | (세종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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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년 | (세종 10년) | |
1429년 | (세종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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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 (세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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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 (세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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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 (세종 13년) | |
1432년 | (세종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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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 (세종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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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 (세종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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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 (세종 17년) | |
1436년 | (세종 18년) | |
1437년 | (세종 19년) | |
1438년 | (세종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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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년 | (세종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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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 | (세종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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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 | (세종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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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 | (세종 24년) | |
1443년 | (세종 25년) |
|
1444년 | (세종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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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 | (세종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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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 (세종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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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 | (세종 29년) |
|
1448년 | (세종 30년) |
|
1449년 | (세종 31년) | |
1450년 | (세종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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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 | (문종 1년) |
|
1452년 | (문종 2년) |
|
1453년 | (단종 1년) |
|
1454년 | (단종 2년) |
|
1455년 | (세조 1년) |
|
1456년 | (세조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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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 | (세조 3년) |
|
1458년 | (세조 4년) | |
1459년 | (세조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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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 | (세조 6년) |
|
1461년 | (세조 7년) | |
1462년 | (세조 8년) | |
1463년 | (세조 9년) |
|
1464년 | (세조 10년) | |
1465년 | (세조 11년) | |
1466년 | (세조 12년) |
|
1467년 | (세조 13년) |
|
1468년 | (세조 14년) |
|
1469년 | (예종 1년) |
|
1470년 | (성종 1년) | |
1471년 | (성종 2년) |
|
1472년 | (성종 3년) | |
1473년 | (성종 4년) |
|
1474년 | (성종 5년) |
|
1475년 | (성종 6년) |
|
1476년 | (성종 7년) | |
1477년 | (성종 8년) |
|
1478년 | (성종 9년) |
|
1479년 | (성종 10년) | |
1480년 | (성종 11년) | |
1481년 | (성종 12년) |
|
1482년 | (성종 13년) | |
1483년 | (성종 14년) | |
1484년 | (성종 15년) |
|
1485년 | (성종 16년) |
|
1486년 | (성종 17년) | |
1487년 | (성종 18년) | |
1488년 | (성종 19년) |
|
1489년 | (성종 20년) | |
1490년 | (성종 21년) | |
1491년 | (성종 22년) | |
1492년 | (성종 23년) |
|
1493년 | (성종 24년) |
|
1494년 | (성종 25년) |
|
1495년 | (연산군 1년) | |
1496년 | (연산군 2년) | |
1497년 | (연산군 3년) | |
1498년 | (연산군 4년) |
|
1499년 | (연산군 5년) | |
1500년 | (연산군 6년) |
|
1501년 | (연산군 7년) |
|
1502년 | (연산군 8년) | |
1503년 | (연산군 9년) | |
1504년 | (연산군 10년) |
|
1505년 | (연산군 11년) | |
1506년 | (중종 1년) |
|
1507년 | (중종 2년) | |
1508년 | (중종 3년) | |
1509년 | (중종 4년) | |
1510년 | (중종 5년) |
|
1511년 | (중종 6년) |
|
1512년 | (중종 7년) |
|
1513년 | (중종 8년) | |
1514년 | (중종 9년) | |
1515년 | (중종 10년) | |
1516년 | (중종 11년) | |
1517년 | (중종 12년) |
|
1518년 | (중종 13년) |
|
1519년 | (중종 14년) |
|
1521년 | (중종 16년) | |
1522년 | (중종 17년) | |
1523년 | (중종 18년) | |
1524년 | (중종 19년) | |
1525년 | (중종 20년) | |
1526년 | (중종 21년) | |
1527년 | (중종 22년) |
|
1528년 | (중종 23년) | |
1529년 | (중종 24년) | |
1530년 | (중종 25년) |
|
1531년 | (중종 26년) | |
1532년 | (중종 27년) | |
1533년 | (중종 28년) | |
1534년 | (중종 29년) |
|
1535년 | (중종 30년) | |
1536년 | (중종 31년) |
|
1537년 | (중종 32년) | |
1538년 | (중종 33년) | |
1539년 | (중종 34년) | |
1540년 | (중종 35년) | |
1541년 | (중종 36년) |
|
1542년 | (중종 37년) | |
1543년 | (중종 38년) |
|
1544년 | (중종 39년) |
|
1545년 | (인종 1년) |
|
1546년 | (명종 1년) | |
1547년 | (명종 2년) | |
1548년 | (명종 3년) | |
1549년 | (명종 4년) | |
1550년 | (명종 5년) |
|
1551년 | (명종 6년) | |
1552년 | (명종 7년) | |
1553년 | (명종 8년) |
|
1554년 | (명종 9년) |
|
1555년 | (명종 10년) |
|
1556년 | (명종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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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년 | (명종 12년) | |
1558년 | (명종 13년) | |
1559년 | (명종 14년) |
|
1560년 | (명종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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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 | (명종 16년) | |
1562년 | (명종 17년) | |
1564년 | (명종 18년) | |
1558년 | (명종 19년) | |
1565년 | (명종 20년) |
|
1566년 | (명종 21년) | |
1567년 | (명종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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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 (선조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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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 | (선조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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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 | (선조 3년) | |
1571년 | (선조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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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 (선조 5년) | |
1573년 | (선조 6년) | |
1574년 | (선조 7년) | |
1575년 | (선조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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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 | (선조 9년) | |
1577년 | (선조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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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년 | (선조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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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년 | (선조 12년) | |
1580년 | (선조 13년) | |
1581년 | (선조 14년) | |
1582년 | (선조 15년) | |
1583년 | (선조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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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 (선조 17년) | |
1585년 | (선조 18년) | |
1586년 | (선조 19년) | |
1587년 | (선조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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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 (선조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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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 (선조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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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 (선조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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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 (선조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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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 (선조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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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 (선조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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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 (선조 27년) | |
1595년 | (선조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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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 (선조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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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 (선조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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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 (선조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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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 (선조 32년) | |
1600년 | (선조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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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 (선조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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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 (선조 35년) | |
1603년 | (선조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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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 (선조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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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 (선조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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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 (선조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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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 (선조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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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 (선조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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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 (광해군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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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 (광해군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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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 (광해군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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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 (광해군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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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 (광해군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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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 (광해군 6년) |
|
1615년 | (광해군 7년) | |
1616년 | (광해군 8년) |
|
1617년 | (광해군 9년) | |
1618년 | (광해군 10년) | |
1619년 | (광해군 11년) |
|
1620년 | (광해군 12년) |
|
1621년 | (광해군 13년) | |
1622년 | (광해군 14년) | |
1623년 | (인조 1년) |
|
1624년 | (인조 2년) |
|
1625년 | (인조 3년) | |
1626년 | (인조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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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 (인조 5년) |
|
1628년 | (인조 6년) |
|
1628년 | (인조 6년) |
|
1629년 | (인조 7년) | |
1630년 | (인조 8년) | |
1631년 | (인조 9년) |
|
1632년 | (인조 10년) | |
1633년 | (인조 11년) |
|
1634년 | (인조 12년) | |
1635년 | (인조 13년) | |
1636년 | (인조 14년) |
|
1637년 | (인조 15년) |
|
1638년 | (인조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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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 (인조 17년) | |
1640년 | (인조 18년) | |
1641년 | (인조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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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 | (인조 20년) | |
1643년 | (인조 21년) |
|
1644년 | (인조 22년) | |
1645년 | (인조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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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년 | (인조 24년) |
|
1647년 | (인조 25년) |
|
1648년 | (인조 26년) | |
1649년 | (인조 27년) |
|
1650년 | (효종 1년) | |
1651년 | (효종 2년) |
|
1652년 | (효종 3년) |
|
1653년 | (효종 4년) |
|
1654년 | (효종 5년) | |
1655년 | (효종 6년) |
|
1656년 | (효종 7년) | |
1657년 | (효종 8년) |
|
1658년 | (효종 9년) |
|
1659년 | (효종 10년) |
|
1660년 | (현종 1년) | |
1661년 | (현종 2년) | |
1662년 | (현종 3년) |
|
1663년 | (현종 4년) | |
1664년 | (현종 5년) | |
1665년 | (현종 6년) |
|
1666년 | (현종 7년) |
|
1667년 | (현종 8년) | |
1668년 | (현종 9년) |
|
1669년 | (현종 10년) |
|
1670년 | (현종 11년) | |
1671년 | (현종 12년) |
|
1672년 | (현종 13년) | |
1673년 | (현종 14년) | |
1674년 | (현종 15년) |
|
1675년 | (숙종 1년) | |
1676년 | (숙종 2년) | |
1677년 | (숙종 3년) |
|
1678년 | (숙종 4년) |
|
1679년 | (숙종 5년) |
|
1680년 | (숙종 6년) |
|
1681년 | (숙종 7년) | |
1682년 | (숙종 8년) |
|
1683년 | (숙종 9년) |
|
1684년 | (숙종 10년) | |
1685년 | (숙종 11년) |
|
1686년 | (숙종 12년) | |
1687년 | (숙종 13년) | |
1688년 | (숙종 14년) | |
1689년 | (숙종 15년) |
|
1690년 | (숙종 16년) | |
1691년 | (숙종 17년) |
|
1692년 | (숙종 18년) | |
1693년 | (숙종 19년) | |
1694년 | (숙종 20년) |
|
1695년 | (숙종 21년) | |
1696년 | (숙종 22년) |
|
1697년 | (숙종 23년) |
|
1698년 | (숙종 24년) |
|
1699년 | (숙종 25년) |
|
1699년 | (숙종 26년) | |
1700년 | (숙종 26년) | |
1701년 | (숙종 27년) |
|
1702년 | (숙종 28년) | |
1703년 | (숙종 29년) | |
1704년 | (숙종 30년) |
|
1705년 | (숙종 31년) |
|
1706년 | (숙종 32년) | |
1707년 | (숙종 33년) |
|
1708년 | (숙종 34년) |
|
1709년 | (숙종 35년) | |
1710년 | (숙종 36년) | |
1711년 | (숙종 37년) |
|
1712년 | (숙종 38년) |
|
1713년 | (숙종 39년) | |
1714년 | (숙종 40년) | |
1715년 | (숙종 41년) | |
1716년 | (숙종 42년) |
|
1717년 | (숙종 43년) | |
1718년 | (숙종 44년) | |
1719년 | (숙종 45년) | |
1720년 | (숙종 46년) |
|
1721년 | (경종 1년) | |
1722년 | (경종 2년) |
|
1723년 | (경종 3년) |
|
1724년 | (경종 4년) |
|
1725년 | (영조 1년) |
|
1726년 | (영조 2년) | |
1727년 | (영조 3년) |
|
1728년 | (영조 4년) |
|
1729년 | (영조 5년) | |
1730년 | (영조 6년) | |
1731년 | (영조 7년) |
|
1732년 | (영조 8년) | |
1733년 | (영조 9년) | |
1734년 | (영조 10년) |
|
1735년 | (영조 11년) | |
1736년 | (영조 12년) | |
1737년 | (영조 13년) |
|
1738년 | (영조 14년) | |
1739년 | (영조 15년) | |
1740년 | (영조 16년) | |
1741년 | (영조 17년) |
|
1742년 | (영조 18년) | |
1743년 | (영조 19년) |
|
1744년 | (영조 20년) |
|
1745년 | (영조 21년) | |
1746년 | (영조 22년) | |
1747년 | (영조 23년) |
|
1748년 | (영조 24년) | |
1749년 | (영조 25년) |
|
1750년 | (영조 26년) |
|
1751년 | (영조 27년) |
|
1752년 | (영조 28년) | |
1753년 | (영조 29년) | |
1754년 | (영조 30년) | |
1755년 | (영조 31년) |
|
1756년 | (영조 32년) |
|
1757년 | (영조 33년) | |
1758년 | (영조 34년) |
|
1759년 | (영조 35년) | |
1760년 | (영조 36년) |
|
1761년 | (영조 37년) | |
1762년 | (영조 38년) |
|
1763년 | (영조 39년) |
|
1764년 | (영조 40년) | |
1765년 | (영조 41년) |
|
1766년 | (영조 42년) | |
1767년 | (영조 43년) | |
1768년 | (영조 44년) | |
1769년 | (영조 45년) |
|
1770년 | (영조 46년) |
|
1771년 | (영조 47년) |
|
1772년 | (영조 48년) | |
1773년 | (영조 49년) | |
1774년 | (영조 50년) | |
1775년 | (영조 51년) | |
1776년 | (영조 52년) |
|
1777년 | (정조 1년) | |
1778년 | (정조 2년) |
|
1779년 | (정조 3년) |
|
1780년 | (정조 4년) |
|
1781년 | (정조 5년) |
|
1782년 | (정조 6년) |
|
1783년 | (정조 7년) | |
1784년 | (정조 8년) |
|
1785년 | (정조 9년) |
|
1786년 | (정조 10년) |
|
1787년 | (정조 11년) |
|
1788년 | (정조 12년) |
|
1789년 | (정조 13년) |
|
1790년 | (정조 14년) |
|
1791년 | (정조 15년) |
|
1792년 | (정조 16년) |
|
1793년 | (정조 17년) |
|
1794년 | (정조 18년) | |
1795년 | (정조 19년) |
|
1796년 | (정조 20년) |
|
1797년 | (정조 21년) | |
1798년 | (정조 22년) | |
1799년 | (정조 23년) | |
1800년 | (정조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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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 (순조 1년) |
|
1802년 | (순조 2년) | |
1803년 | (순조 3년) | |
1804년 | (순조 4년) | |
1805년 | (순조 5년) |
|
1806년 | (순조 6년) | |
1807년 | (순조 7년) | |
1808년 | (순조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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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 (순조 9년) | |
1810년 | (순조 10년) | |
1811년 | (순조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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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 (순조 12년) | |
1813년 | (순조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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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 (순조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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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 (순조 15년) | |
1816년 | (순조 16년) | |
1817년 | (순조 17년) |
|
1818년 | (순조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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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 (순조 19년) | |
1820년 | (순조 20년) | |
1821년 | (순조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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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 (순조 22년) | |
1823년 | (순조 23년) | |
1824년 | (순조 24년) | |
1825년 | (순조 25년) | |
1826년 | (순조 26년) | |
1827년 | (순조 27년) |
|
1828년 | (순조 28년) | |
1829년 | (순조 29년) |
|
1830년 | (순조 30년) |
|
1831년 | (순조 31년) |
|
1832년 | (순조 32년) |
|
1833년 | (순조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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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 (순조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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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 (헌종 1년) | |
1836년 | (헌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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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 (헌종 3년) | |
1838년 | (헌종 4년) | |
1839년 | (헌종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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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 (헌종 6년) | |
1841년 | (헌종 7년) | |
1842년 | (헌종 8년) | |
1843년 | (헌종 9년) | |
1844년 | (헌종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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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 (헌종 11년) | |
1846년 | (헌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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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 (헌종 13년) | |
1848년 | (헌종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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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 (헌종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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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 (철종 1년) | |
1851년 | (철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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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 (철종 3년) | |
1853년 | (철종 4년) | |
1854년 | (철종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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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 (철종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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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 (철종 7년) | |
1857년 | (철종 8년) | |
1858년 | (철종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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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 (철종 10년) | |
1860년 | (철종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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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 (철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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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 (철종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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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 (철종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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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 (고종 1년) | |
1865년 | (고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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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 (고종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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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 (고종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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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 (고종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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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 (고종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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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 (고종 7년) | |
1871년 | (고종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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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 (고종 9년) | |
1873년 | (고종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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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 (고종 11년) | |
1875년 | (고종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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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 (고종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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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 (고종 14년) | |
1878년 | (고종 15년) | |
1879년 | (고종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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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 (고종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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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 (고종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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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 (고종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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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 (고종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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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 (고종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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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 (고종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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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 (고종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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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 (고종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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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고종 25년) | |
1889년 | (고종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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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 (고종 27년) | |
1891년 | (고종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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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 (고종 29년) | |
1893년 | (고종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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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 (고종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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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 (고종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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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 (고종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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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 (광무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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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 (광무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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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 (광무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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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 (광무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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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 (광무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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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 (광무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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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 (광무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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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 (광무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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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 (광무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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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 (광무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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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 (융희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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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 (융희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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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 (융희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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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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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
(융희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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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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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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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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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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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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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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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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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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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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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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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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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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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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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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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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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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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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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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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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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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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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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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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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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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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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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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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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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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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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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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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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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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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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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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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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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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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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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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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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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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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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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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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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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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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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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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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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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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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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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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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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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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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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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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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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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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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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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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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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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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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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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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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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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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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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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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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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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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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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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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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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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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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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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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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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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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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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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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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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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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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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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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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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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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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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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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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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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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